2016년 한국에 온 러바오와 아이바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판다 푸바오. 푸바오는 4세가 되는 2024년 종 번식을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 에버랜드·경향신문 자료사진 요즘 부쩍 ‘판다’ 관련 뉴스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중국이 태국에 외교 선물로 보낸 판다(린후이·林惠)가 돌연사했다는 소식이 들렸고요(이 판다의 죽음 때문에 태국이 중국 측에 보상금 6억원가량을 지불해야 한다는군요). 지난 4월에는 2003년 미국 멤피스 동물원으로 대여된 판다 ‘야야(??)’가 중국에 반환됐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죠. 국내에도 2016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방한 때 외교 선물로 받은 판다 부부가 있습니다. 러바오(樂寶·수컷)와 아이바오(愛寶·암컷)입니다. 그 부부 사이가 낳은 판다가 푸바오(福寶)고요. 푸바오는 4세가 되는 2024년에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군요. 이상하죠. 중국이 다른 나라에 건네준 동물을 돌려받는 것도, 돌연사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것도, ‘푸바오’처럼 그 나라에서 태어난 판다까지 돌려줘야 한다는 점도, 모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기증이 아니라 대여 중국의 판다 선물 역사는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1887 ~1975) 주석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1897~2003)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한 쌍을 기증하면서 시작됐는데요. 이후 1949년 대륙을 석권한 중화인민공화국도 판다에게 외교사절의 역할을 맡겼습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미국의 리처드 닉슨(1913~1994·재임 1969~1974)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냈습니다.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보내진 ‘링링(娘娘)’과 ‘싱싱(星星)’은 역사적인 미·중 수교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판다는 중국에서도 1500~1600마리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멸종위기 희귀종이랍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도록 한 워싱턴 협약(1973)의 대상 동물에 포함됐습니다. 따라서 이후에는 ‘장기 임대 방식’으로 판다 외교의 양상이 바뀌었죠. 그러나 판다를 관리하는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니죠. 판다 전용 축사를 세우는 등의 초기비용만 100억원이 든답니다. 게다가 판다 한 쌍당 공식 임대료만 1년에 100만달러씩 꼬박꼬박 내야 합니다. 이 비용은 멸종위기의 희귀동물인 판다의 번식을 연구하는 데 쓰인답니다. 사실 중국은 러바오와 아이바오 말고도 이미 1994년에 ‘밍밍(明明)’과 ‘리리(莉莉)’를 임대한 적이 있습니다. 한·중 수교 2주년을 기념해 보낸 겁니다. 밍밍과 리리는 1998년 불어닥친 외환위기 때문에 중국에 되돌려주었습니다. 하얀 코끼리의 저주 이 대목에서 태국 등 동남아에서 통용되는 ‘하얀 코끼리’ 속담이 떠오릅니다. 하얀 코끼리는 불교국가에서 신령스러운 동물이죠.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하얀 코끼리가 들어가는 꿈을 꾼 뒤 석가모니를 잉태했다는 탄생설화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고대 샴(태국)의 국왕은 꼴 보기 싫은 신하에게 ‘하얀 코끼리’를 하사했습니다. 그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신하는 국왕이 하사한 하얀 코끼리를 지극정성으로 키워야 했죠. 먹잇값은 먹잇값대로 들지만 경제적인 이득은 하나도 없고, 또 잘 돌보지 못해 코끼리가 죽으면 선물을 준 국왕을 욕보이는 셈이 됐으니까요. 따라서 국왕은 밉살맞은 신하를 골탕 먹이고, 결국 파산시키려고 하얀 코끼리를 하사했습니다. 이후 하얀 코끼리는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쓸모도 없고 관리도, 처분도 어려운 ‘애물단지’를 일컫는 용어가 됐습니다. 아프리카 우간다를 하얀 코끼리로 묘사한 1892년 삽화. 당시 영국 동아프리카 회사는 내부 갈등 때문에 통제가 어려워진 우간다 상황을 ‘하얀 코끼리’로 간주했다. / 위키피디아, 원 삽화는 ‘Punch, or the London Charivari’, Vol 103) 코끼리 유배사건 <조선왕조실록>에 ‘하얀 코끼리’와 비슷한 사례가 나옵니다. 병조판서 유정현(1355~1426)이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으니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하지만…(코끼리를) 절도로 유배 보내야 한다”고 아뢴 <태종실록>(1413년 11월 5일자) 기사를 볼까요. 사고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이 코끼리는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모치(源義智)가 바친 ‘외교 선물’이었습니다(1411년 2월 22일). 1년 10개월 뒤인 1412년 12월 10일 이 코끼리가 공조전서를 지낸 이우(?~1412)를 밟아죽였습니다. “일본 국왕(아시카가 요시모치)이 잘 길들인 코끼리를 바쳐 3군부(군사업무 총괄 부서)에서 길렀다. 그런데 이우가 코끼리를 보고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이에 자극을 받은 코끼리가 이우를 밟아죽였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 석을 먹어댔기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까지 밟아죽였던 겁니다. ‘죄상이 드러난’ 코끼리의 유배지로는 전라도 장도(獐島)가 낙점됐습니다. 코끼리가 유배됐던 전라도 장도. 노루섬으로 일컬어진 장도에는 조선시대부터 동물들의 방목장으로 활용됐다. 지금은 율촌산업단지 개발로 육지와 연결돼 있다. / , 이재언, 이어도출판사, 2021 눈물 흘린 코끼리 6개월 후(1414년 5월 3일) 전라 관찰사가 이색 상소문을 올립니다. “(코끼리가) 좀처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태종 임금조차 ‘울컥’해 “불쌍하구나. 코끼리의 유배를 풀어주라”는 명을 내립니다. 코끼리는 단식투쟁과 눈물의 호소로 태종의 사면령을 받고 육지로 돌아오는데요. 이 코끼리의 운명이 기구했습니다. 1420년(세종 2)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가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 백성들이 괴롭다”면서 ‘순번사육’을 제안합니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충청~경상도를 떠도는 처지가 됐습니다. ‘떠돌이’ 스트레스가 심했겠죠. 코끼리가 또 사고를 쳤습니다. 1421년(세종 3) 3월 14일 충청도 공주의 사육사가 코끼리에 차여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습니다. “코끼리가 하루 먹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의 10배는 됩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공작새도 유배를 떠났다 일본이 코끼리만 외교 선물로 보낸 건 아닙니다. 공작새도 보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1589년 7월 12일·선조 22) 조선을 방문 중이던 쓰시마(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공작 한 쌍과 조총 2~3정 등을 바쳤습니다. 고려 역사 중 최대 미스터리로 꼽히는 ‘만부교 사건’. 942년 고려 태조 왕건은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거란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로 유배시키는 한편 낙타 50필을 송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만들었다. / , 북한 외국문 출판사, 2018 조선 조정은 생전 처음 보는 조총을 환영했습니다. 공작의 처리를 두고는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받자니 조선의 풍토에는 맞지 않는 새였고요. 그렇다고 받지 않자니 외교적인 결례가 될 수 있어서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았습니다. “일본 사신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수목이 울창한 남양(전남 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겨라.”(8월 1·4일, 12월 11일) 뭐 일본이 ‘하얀 코끼리의 저주’ 고사를 알고 코끼리(혹은 공작새)를 선물로 보내지는 않았겠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달갑지 않은’ 일본의 선물 때문에 쓸데없는 비용과 정력이 낭비됐던 건 사실이죠. 조정의 공론도 공연히 흩어졌고요. “초심을 잃을까 걱정됩니다” 예부터 외국이 선물로 보내는 ‘진금기수(珍禽奇獸)’는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례가 있습니다.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기원전 1043)에게 각 제후국이 선물을 바쳤습니다. 그중 서방의 제후국인 서려(西旅)가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치는데요. 개국공신인 소공 석(생몰년 미상)은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고 무왕을 말립니다. “토종이 아닌 진귀한 새와 짐승은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 군주가 외국산 진금기수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군주들도 이 무왕과 소공의 고사를 금과옥조로 삼았습니다. 동이족의 나라로 알려진 전국시대 중산국(?~기원전 296년) 왕릉에서 1974년 출토된 개(犬)의 유골.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가 눈에 띈다. 중산국의 개는 당대 ‘북견(北犬)’으로 알려져 중원에서도 수입했다고 한다. / 도쿄국립·고베 효고 현립 근대·나고야시 박물관 공동주최, 도록, 1981 연산군도 일본의 진상품을 거절했다 예컨대 성종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를 전했습니다(1478년 8월 10일).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산군은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치자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 말라”는 명을 내립니다. “일본이 예전(세조 때를 뜻함)에 바친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려고 한다.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하라.”(<연산군일기> 1502년 11월 14일)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답니다. 그렇다면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조선도 그만한 선물로 답례해야 할 것 아닙니까. 연산군은 그 부분을 지적했습니다(1502년 12월 14일). 신료들은 그러나 “외교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것이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백성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자칫 분쟁의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외교 결례라고 간언하는 신하들…. 얼마나 건전한 임금과 신하 간 논쟁입니까. 낙타를 굶겨죽인 만부교 사건의 미스터리 동물외교에 잘못 대응하는 바람에 나라가 위태로워진 적도 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942년(고려 태조 25) 10월,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한 거란이 고려에 사절단 30명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냅니다. 태조가 그러나 좀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거란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로 유배시키는 한편으로 낙타 50필을 송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만든 겁니다. 태조는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거란은 (고구려의 옛땅인) 발해를 하루아침에 멸망시켰다. 무도한 거란과 화친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려사>) 낙타를 굶겨죽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가 단교했습니다. 고려는 결국 3차례에 걸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집니다. 태조 왕건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만부교 사건 후 360여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도 이제현(1287~1367)에게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일본이 선물한 원숭이를 받지 않았다. 연산군은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원숭이를 외교 선물로 받으면 조선도 그만한 선물로 답례해야 할 것 아니냐. 돌려주라”는 명을 내린다. / 서울대공원 홈페이지 캡처 “임금이 낙타를 수십 마리 정도 키운다고 해서 그 피해가 과연 백성에게 이를까. 그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겨죽였는지 모르겠구나.” 후대 인물인 이제현인들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현도 “태조의 심중에 반드시 숨은 뜻이 있었을 것이지만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느냐”고 언급을 회피했습니다. ‘인생’보다 ‘판생’ 얼마 전 새끼 판다 ‘푸바오’를 키워온 강철원 사육사가 TV프로그램(<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했다는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더군요.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과 동물의 행복은 다르다”는 겁니다.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푸바오와 떨어진다는 게 아쉽고 슬프지만, 그것은 인간의 심정일 뿐이라는 거죠. 철저하게 단독생활을 하는 판다의 습성과 4세 이후 생기는 번식본능 등을 고려하면 푸바오의 중국행이 순리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인생’이 있듯이, 판다에게는 ‘판생’이 있다는 얘기죠. 그러고 보니 <태종실록>에 등장하는 코끼리가 자꾸 눈에 밟힙니다. 사람을 밟아 죽여 외딴 섬으로 유배까지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룟값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죠. 사람의 입장에선 ‘애물 덩어리’였겠죠. 그 코끼리 ‘코생’은 또 얼마나 스트레스받는 삶이었겠습니까. 모든 게 낯선 이역만리까지 와서 “못생겼네, 지독히도 많이 처먹네” 하는 지청구를 들으며 구박받았을 테니까요. 판다 외교는 어떨까요. 미·중 국교수립의 상징이 됐듯 한때는 판다가 우호와 협력의 마스코트로 사랑받았던 건 사실이죠. 이제는 어떨까요.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앞으로는 무슨 외교 선물로 판다를 주고받는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판생’도 생각해줍시다. 비용도 많이 든다면서…. |